고봉준의 언더라인

Relea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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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유너머N이 있는 북 아현동은 장마가 끝나자 마자 재개발이 될 것이다. 연구실이 이사 온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또 다시 이사 갈 준비를 하고 있다. 마을버스를 타고 올라가는 길에는 지은 지 30년쯤 된 건물들에서부터 갓 지은 건물들까지 용도, 종류가 다양한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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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있는 친구들에게서 가끔 전화가 오곤한다. 이들의 하소연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말이 붙는다. '뭐랄까. 잘못된 건 없는 데 뭐가 잘못된 느낌이라고 할까. 내가 내가 아닌 것 같다고 할까. 좀 허무하다고 할까' 대학교 4년 내내 목숨을 걸어가며 준비한 끝에 대기업에 들어간 친구들도 곧잘 이런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 PiAdornoTW1
    우울과 허무주의는 철학에서 언제나 끈질기게 따라붙는 물귀신 같은 것이었다. 철학뿐만이 아니다. 그리스 시대의 비극을 포함해서 모든 예술작품은 그것이 허무와 구원의 문제로부터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어째서 그럴까? 어떻게 ‘허무주의’는 하나의 ‘~주의’로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길바닥에 앉아 한탄하는 자들을 가리켜야 할 것이 아닌가? 우울과 절망이 어떻게 철학자의 사유의 원동력이 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도르노의 책 가 그렇다. 어찌보면 이 책은 우울과 절망으로 점철된 염세주의자의 책이라고 볼 수도 있다. 밑도 끝도 없는 어둠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 276_이웃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신분석학은 신학적이고 가족주의적이다. 정신분석학은 세상을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유지되는 가족 질서로 본다. 욕망의 원초적 금지자로서의 아버지, 욕망의 원형적 대상으로서의 어머니, 아버지의 법을 내면화한 아들(남자)과 그것을 선망하는 딸(여자)로 구성된 외디푸스적 가족. 이 가족주의적 신학의 구도는 정치적으로 주권-사법적 질서로 구현된다. 아버지는 대지에 노모스(율법)를 선포하는 주권자이며, 어머니는 법에 포획된 대지의 삶이고, 아들(남자)은 법 바깥으로의 추방을 두려워하면서 법 안에 포획된 신민이며, 딸(여자)은 법의 경계에 있기에 법 안쪽을 선망하는 자유민이다...
  • 266_1초에+24번의+죽음
    당신은 자신을 시네필이라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반복 강박의 충동에 사로잡혀있는 건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만 한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영화 사랑의 세 가지 단계를 이야기할 때, 그 첫 번째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시네필의 이러한 특성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반복 관람을 통해 시네필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시네필은 ‘자신만의 영화’를 원한다. 그것이 자신이 존경하는 위대한 감독의 영화라 할지라도, 그들은 나만이 기억할 수 있는 작가적 서명을 발견하고자 하며, 그럼으로써 나만의 영화, 나만의 감독, 나만의 숏, 나만의 편집, 나만의 인물과 배우를 소유하려 한다. 시네필은 자신에게만 특권화된 그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페티시적 욕망으로 충만하다...
  • 주권의 너머에서
    2004년에 처음 도쿄에 간 일이 있다. 번화가인 신주쿠에서 본 여러 유형의 노숙인들이 인상적이었는데, 부부로 여겨지는 이들, 혹은 한때 번듯한 사회적 지위를 누렸을 것 같은 이들, 뭔가 개인적인 것으로만은 읽을 수 없는 이력들을 흔적으로 갖고 있는 이들이 강한 인상으로 남은 일이 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다시 도쿄에서 한동안 지내게 되어서 신주쿠는 자주 지나다니게 되었는데, 한쪽의 정체모를 조형물들이 늘 의아했다. 그곳은 신주쿠 역 서쪽 출구 지하도였는데, 조야한 색칠을 한 비쭉비쭉한 좀 흉물스런 조형물들이 한쪽 공간을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앉아서 쉴만한 곳도 아니었고, 어떤 의미(용도)가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공공미술작품이라고는 결코 생각해 볼 수도 없는 조형물이었는데, 훗날 얘기 듣기로는 아니나 다를까 노숙자 추방을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 24_ud_03
    최근 국내에서 번역된 발리바르의 저작, < 우리, 유럽의 시민들?>을 관통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1990년대 유럽의 맥락에서 정치의 가능조건을 다시 묻는 것이다. 역사적 사회주의가 몰락, 제3세계로부터 이주해오는 인구들의 급증, 자본주의 질서의 전지구화, 유럽연합 건설 프로젝트의 구체화라는 정세 속에서 유럽의 정치적 환경은 급속도로 변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급변하는 유럽의 정세 속에서 인종청소로 불리는 발칸 전쟁이 발발하였다. 동유럽에서 다양한 종족적 동일성을 통합하던 권력형태인 국가가 붕괴로 인해 집단적으로 심각한 동일성의 위기에 처하게 된 자들이 인종이라는 상상적 동일성을 통해 그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 다른 인종을 자신들을 위협하는 타자로 설정하여 그들에게 잔혹한 폭력을 휘두르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 신문을 보다 숨이 턱 막힐 때가 있다. 2009년 용산에서 무리한 진압으로 철거민 다섯 분과 경찰관 한 분이 돌아가셨을 때가 그러했다. 국가 권력에 의해 사람이 죽었지만, 국가 권력은 결코 처벌받지 않는다. 용산 참사만이 아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과잉 단속으로 사람이 죽어나갈 때, 테러범을 잡는답시고 엄한 사람을 폭행하고 증거도 없이 수용소에 가둘 때, 그러고도 당당한 ‘놈’들의 모습을 볼 때, 숨이 막히다 못해 돌아버릴 지경이다. 우리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국가 권력을 고발하고 규탄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