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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노동 문제만큼 복잡한 문제도 없다. 프랑스인과 노동의 관계만큼 뒤틀린 관계도 없을 것이다. 안달루시아, 알제리, 나폴리에 가보라. 그들은 노동을 아주 경멸한다. 독일, 미국, 일본에 가보라. 그들은 노동을 숭배한다. 사태가 변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일본에는 오타쿠(otaku), 독일에는 기꺼이 실업자가 된 사람들(frohe Arebeitslose)이 넘쳐나고 반대로 안달루시아에는 일중독자(workholics)가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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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경계위원회(CVC, comité de vigilance citoyen)”에서 온 선생들이 20시[20-Heures, 저녁 뉴스]에 출현해서 누군가 자기 학교를 태워버렸다고 질질 짜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어렸을 때 얼마나 그런 일을 자주 꿈꾸었던가를 생각한다. 또 우리는 껄렁껄렁한 젊은 애들이 길거리 지나가는 사람을 부르거나, 진열대의 상품을 훔치거나, 자동차에 불을 지르거나, 경찰기동대(les CRS)와 술래잡기를[검거를 피하며 경찰을 농락] 하는 것을 본 좌파 지식인이 욕설을 내뱉는 것을 들으면서, 1960년대의 검은 잠바들[불량배들], 아니 그보다는 “아름다운 시절[벨 에포크, Belle Époque]”에 아파치들(apaches)을 향해 내뱉던 말들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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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사태(l'etat d'urgence)를 선포하고 열다섯 먹은 애들과 맞서 싸우는 정부. 자기 안전(salut)을 축구팀에 맡겨 둔 나라. 병원 침대에서 자신이 “폭력”의 희생자였음을 부각시키는 경찰. 나무로 [겨우] 집을 지은 사람들에게 강제명령을 내리는 도지사. 장난감 대여소에 불을 지른 혐의를 받은, 셸르(Chelles)에 사는 열 살 먹은 두 아이. 이 시대는 상황의 어떤 기괴함(grotesque) -매 번 빠져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기괴함-을 놓고 볼 때 참으로 탁월한 시대다. 불평과 분노를 담은 어투로 미디어들은 이런 뉴스를 받아들일 때 터져 나올 웃음소리를 억누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할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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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것(CE QUE JE SUIS)”, 그게 뭔데? 젖, 냄새들, 이야기들, 소리들, 감정들, 어릴 적 동요들, 물질들, 몸짓들, 생각들, 인상들, 시선들, 노래들, 익살들의 흐름을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쭉 관통해왔다. 나란 뭐냐고? 내 모든 부분들이 이러저런 장소들, 고통들, 조상들, 친구들, 연인들, 사건들, 언어들, 기억들, 분명히 나는 아닌 그런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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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다.” 이것은 세계에 대해 마케팅이 내놓은 최후의 것이자, 달라지기를(être différent), 자신만의 색채를 갖기를(être soi-mê̂me], 펩시를 마시기를 자극하는 온갖 부추김에서 아주 많이 나간, 광고의 진화 중 최종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수십 년이 걸려서 개념들은 바로 이 순수한 동어반복에 도달했다. 나=나(JE=JE). 그는 헬스클럽에서 거울을 보며 런닝머신(트레드밀) 위를 달리고 있다. 그녀는 스마트카를 몰고 퇴근을 한다. 과연 그들이 서로 만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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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상황에 대한 사회적 해결책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환경들, 제도들, 사람들이 반어적으로 ‘사회(société)’라고 부르는 개별적 기포들(bulles)의 모호한 집합체(agrégat)가 어떤 일관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공동의(코뮨적, commune) 경험을 설명할 마땅한 언어가 아직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언어를 나누어 갖지 않을 때 사람들은 부를 나누어 갖지도 않는다. 계몽(Lumières)을 둘러싼 투쟁으로부터 프랑스 혁명의 가능성을 정초하는 데 반 세기가 필요했고, 노동을 둘러싼 투쟁으로부터 ‘복지국가(État providence)’를 낳는 데 한 세기가 필요했다. 투쟁들은 새로운 질서를 표현할 언어를 창조한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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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각도에서 접근하든지 현재에는 출구가 없다. 이는 결코 현재의 미덕(능력, vertus)이 아니다. 그것은 간절히 희망을 품고자 하는 이들로부터 모든 지지대를 빼앗아버렸다. 해결책을 쥐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금세 반박되고 있다. 오직 인정된 것은 모든 게 더 나빠지기만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미래에는 장래〔가망〕가 없다(Le futur n'a plus d'avenir)”는 말은, 극히 정상적인 외모를 가진 채 일급 펑크족의 의식 수준에 이른 우리 시대의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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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시장 니힐리즘이 지배해온 지난 두 세기는 우리에게 극단적인 소외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소외, 타인으로부터의 소외, 세계로부터의 소외-를 안겨왔다. 개인이라는 허구는 그것이 실재적이 되어가는 만큼이나 똑같은 빠르기로 해체되어 왔다. 메트로폴리스의 아이들인 우리는 다음을 확신한다: 즉 코뮨주의의 가능성은 끊임없이 억눌려왔고 계속 추방되어 온〔푸닥거리를 당해온, cojured away〕, 실존의 가장 극심한(profound) 박탈에 있다는 사실 말이다. 모든 것이 말해지고 모든 것이 행해졌을 때, 그것은 우리가 전체 인류학과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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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동의한다. 이제 폭발할 시점이라는 것을. 마치 어제 카페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의회의 복도에서도 심각하고 조금은 젠체하는 표정으로 그 사실을 인정한다. 위험을 계산하는 것에는 약간의 즐거움이 있다. 이미 우리는 영토를 안전하게 할 예방 조치들의 상세 메뉴를 제공받았다. 신년 축제 분위기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내년에는 굴이 없을 거다,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라구!” 축하행사가 전통적인 무질서로 완전히 뒤덮이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 내무부장관 알리오-마리(Alliot-Marie)는 36,000명의 경찰과 16개의 헬리콥터를 출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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