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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일을 왜 사과해야하는지 모르겠다. 영화에서 그런 설정이 많이 나온다. 다른 사람을 사랑해놓고 배우자 혹은 애인에게 눈물 흘리며 속죄의 발언을 한다. 난 그것이 못마땅하다.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도 사랑했다는 것인가? 이것은 사랑에 대한 모독이다. 사랑의 자유의지를 전제하는 것이다. 맹금류가 양을 잡아먹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와 같다. 동의할 수 없다. '그 잔인'은 아무 죄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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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파하는 12시 40분이면 어김없이 핸드폰이 울린다. 액정에 새겨진 이름 꽃수레. 집 전화다. 며칠 전엔 현관문을 열었을 때 책상에 엄마가 없으면 너무 허전하다며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는 제목으로 일기를 써서 나를 놀래킨 딸내미. 이번엔 또 어떻게 마음을 달래주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받는다. 짐짓 밝은 척 오버한다. “어, 우리 딸, 집에 왔구나!” “오늘로 6일째야. 엄마가 집에 없는 거....” 풀이 다 죽은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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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키운 8할은 오빠들이다. 열아홉 이후에는 늑대소굴에서 살았다. 그들을 남자로 보았을 리 만무하다. 사랑과 우정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킬 여지도 없었다. 성적인 것에 무지했다. 순결이데올로기가 내면화된 줄도 모른 채였다. 당시 내게 남자란 이성理性. 다른 성별이 아니라 합리적 존재였다. 같이 있으면 말도 통하고 배우는 것도 많고 즐거웠다. 좋은 사람의 좋은 기운에 끌렸고 그들도 나를 국민여동생처럼 예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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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소강상태다. 비가 벌써 그립다. 장마는 싫어도 비는 좋은데. 아쉽다. 생활인이 되고서는 긴 비가 원망스럽다. 이유는 빨래가 마르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여름철에 땀도 많이 흘려 옷이며 수건이 하루에도 몇 장씩 나오는데 비가 오면 빨래가 마르지 않고 말라도 눅진눅진하여 영 불쾌하다. 며칠 전에는 하는 수 없이 빨래를 세탁기에서 꺼내자마자 다림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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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구석에서 사는 아이가 희귀난치병이다. 몇 번 들었어도 이름을 외기 힘든 척수성근위축증. 태어나자마자 사지에 힘이 빠진다. 심폐기능이 약해 호흡이 어렵다. 지역 내 큰 병원에서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억척스레 아이를 들쳐 업고 상경했다. “그래도 큰 병원 가봤다는 소리는 들어야지 원이 없잖아요.” 난 이런 얘길 들을 때 눈을 어디다 두어야할지 모르겠다. 그녀의 투박하고 새까만 문신한 눈썹과 실밥 뜯어진 비즈가 처량하게 매달린 네크라인을 멀뚱멀뚱 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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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단장 컨셉에 맞추느라 신발장을 지키던 7센티 정통 하이힐 신고 외출했다가 아주 고생을 했다. 집에 오자마자 벌겋게 달궈진 발을 따순 물로 씻고 로션을 발랐다. 왠지 뼈랑 힘줄이 툭 튀어나온 것 같아서 발을 정성스레 주물렀다. 구겨진 발톱을 폈다. 불과 작년까지 멀쩡히 신어놓구선, 저 신발 당장 버릴 거라고 투덜거렸다. 그 꼴을 아들이 보더니 “그러게 왜 하이힐은 신었어요” 한다. 그 뉘앙스가 꼭 전원일기 김회장이 팔순 노모 나무라는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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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남성동지들의 연인이 되어주며 독신으로 살 줄 알았던 선배다. 뜻밖에 서른중반에 같이 일하는 연하남 동지랑 결혼했다. 아이없이 지냈다. 마흔이 넘으니 슬슬 아기가 눈에 들어온다고 했는데 아기를 가지려니 생기지 않았다. 두 번의 유산. 언니가 '유산했다'고 전화한 날, 언니네 잠시 들렀는데 서랍장 위에 장난감 같은 아기신발이 놓여있었다. 그걸 보니 마음이 짠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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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여기에서 다시 만난 것은 어느 별이 도운 것일까요?' 삼류 멜로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대사. 순박해서 익살스러운 이것은 니체의 말이다. 니체가 평생 사랑했던 단 한명의 여인, 루 살로메를 처음 보고 건넸다는 유명한 인사말이다. 38세의 니체는 21세의 루에게 변변한 데이트도 없이 청혼했다가 묵사발이 된다. 안타깝게도 루는 단 한번도 니체를 사랑하지 않았다. 루가 꽤 매력적이고 총명했나보다. 루는 훗날 릴케, 프로이트까지 당대의 지성들과 러브라인을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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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전후로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냈다. 그냥 다 속상하고 안타깝고 갑갑했다. 적합한 관념을 취하지 못해 심하게 작용 받았다.;; 화병이 났는지 선거 날은 아침부터 심한 두통이 찾아왔다. 침대에 자석처럼 붙어 있다가 오후 2시에 가까스로 투표장에 갔다. 줄이 길었다. 안에서 먼저 투표를 하고 나오던 40대 남자가 내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는 반갑게 아는 척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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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감이라는 것. 선천적인 부분도 있지만 나이 들면서 경험치에 비례해 발달하는 측면이 있다. 특히 고통 체험이 감각세포를 단련시킨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도 있듯이 번뇌 그 후, 눈에 들어오는 세계는 넓고 깊어진다. 암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한테 가을날 단풍이나 밤하늘 둥근달이 이전처럼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또 자아 붕괴의 통증으로 몸부림쳐본 사람은 누군가의 표정과 말투에서도 고유의 느낌을 짚어내는 신통력을 발휘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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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까지 매주 월요일 점심때면 아버지가 오셨다. 빈 반찬통이 들은 가방과 아이들 과자를 한보따리 들고 오신다. 그러면 나는 일주일치 밑반찬을 만들어서 빈통에 담아 드렸다. 반찬이라고 해봐야 뭐 별거 있을까. 멸치나 북어를 볶은 마른반찬 한 가지, 삼색나물 중 두어가지, 오뎅이나 두부조림, 불고기나 오징어볶음 같은 단백질류 등등이다. 일요일에 준비하거나 월요일 아침에 허겁지겁 준비하는데, 그 시간이 한없이 우울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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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란 말만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누구도 행복할 땐 시를 쓰지 않을 것이다. 아니, 내가 살만할 땐 시를 읽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해서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생이 막막할 때 삶에 지칠 때 처방전을 찾기 위해 시집을 편다. 톨스토이의 통찰대로 행복한 사람들의 이유는 대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사람들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 그 오만가지 상처의 사례가 시집에 들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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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광주가 참 좋아요." 두해전 5월이었다. 광주역 앞. 기차를 기다리던 나는 가슴팍으로 짱짱하게 파고 드는 남도의 햇살을 쬐이면서 중얼거렸다. "만약에 서울을 떠나면 광주에서 살고 싶어요." "왜요?" 옆에서 물었다. "따뜻하니까, 뜨거우니까, 맛있으니까" 내게 광주는 온통 뜨겁고 따스하고 맛깔스런 기억 뿐이다. 열아홉 어느 날, 명동성당 앞에서 삭발한 모습으로 거리선전전을 펼치던 조대생 언니를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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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혼자 살아요" "결혼.... 안 하셨나봐요?" "해봤어요" 영화 <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의 대화다. 신선했다. 여자주인공의 이혼을 심각하지 않고 덤덤하게 그렸다. 심지어 ‘해봤어요’ 할 때 은수가 능력자로 보였다. 결혼도 해보고 이혼도 해본, 그래서 삶의 다양한 세계와 접속한 강자 말이다. 10년 전, 이 영화가 나올 때만 해도 이혼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부정적이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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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싯적부터 눈물이 많았는데 아줌마 되니까 더 궁상이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서 혹은 음악을 듣다가 찡해서 눈물짓는 일 다반사다. 사진을 보고 울어본 적도 있다. 딱 두 번이다. 뭐 울었다기보다 핑하니 뜨거운 것이 고였다가 흘렀다고 해야 맞겠다. 둘 다 좋아하는 선배가 찍은 사진이다. 한 번은 한대수선생님 흑백사진. 홍대 연습실에서 취재를 마치고 뒷풀이 가는 길, 뒤따라가다가 우연히 찍은 컷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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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겨울로 살았다. 2월에 스위스에 다녀오고 달력을 두 장이나 넘겼다. 그런데도 내도록 얼얼했다. 알프스의 눈이 녹지 않았고 그 위로 서울의 봄눈이 쌓였다. 책상에는 컨베이어벨트처럼 할 일이 끊임없이 돌아왔다. 순간이다. 글 쓰는 일이 글을 해치워야 하는 노동이 될 때가 있다. 제일로 마음 슬프다. 자본가세상 살찌우는 글은 안 쓰고 싶은데 그러면 자본가세상에서 살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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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암 무료검진을 받으라는 통지서가 서울시에서 왔다. 작년 가을 즈음에. 기한이 12월 31일까지였다. 병원 가는 일이 좋을 리 없다. 특히 산부인과. 애 낳고 병원을 한 번도 안 가봤다가 암에 걸려 돌아가신 김점선 화가를 생각했다. 또 무료 건강검진을 받지 않다가 암에 걸리면 보험 혜택이 없다는 얘기도 들린다. 8년 전 애 낳고 진료실 출입이 1회도 없었던 나는, 아직 에미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 새끼를 둔 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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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줄도 모르다가 피를 보면 이내 울어버리는 아이처럼, 난 3월 하순부터 달력을 힐끔거리면서 나를 연민했다. 3월 24일은 딸이 태어난 날이고, 28일은 아들이 태어난 날이다. 해마다 3월이 되면, 날씨도 마음도 뼛속도 스산해진다. 배위로 트럭 3대가 지나가는 것 같던 아득한 통증의 부활. 한 명이 3대씩, 총 6대가 올해도 몸 위를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거기에다 새학기 스트레스가 더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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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사십대 남녀 다섯이 인사동에서 모였다. 전시를 끝낸 지인의 뒤풀이 자리다. 조곤조곤 수다 떨며 와인 한잔 마시는데 마흔 지난 남자가 물었다. “내 나이에 사랑을 하는 게 좋은 거야 안 하는 게 좋은 거야.” 여자들이 개구리합창처럼 답했다. “당근 하는 게 좋지.” 능력 있음 해보라는 식이었다. 남자는 이내 도리질이다. 희생이 너무 커서 싫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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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날드 2층. 평일 1시. 방과 후 친구엄마들을 따라 온 아이를 데리러 왔다. 200여석이 엄마들로 꽉 찼다. 테이블마다 삼삼오오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식은 커피와 감자튀김 앞에 두고 열띤 대화가 오간다. 우리반 엄마들도 마찬가지다. 개학후 일주일 지났건만, 2학년 1반부터 6반까지 각반 담임의 행적과 신상명세와 성향 그리고 교문 밖의 뜨고 지는 학원 현황까지 시시콜콜 공유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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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은 많지만 밥 굶는 사람은 없다고들 한다. 그래도 그들을 생각하면 심히 걱정스러웠다. 시인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 시집은 정말 안 팔리는 책이다. 책값도 헐하다. 활동가들도 박봉으로 어떻게 3~4인 가족이 먹고 살까. 몇 년 전부터 이 문제에 관심이 갔다. 기회가 될 때마다 직간접적으로 알아보았다. 대체로 그들은 혼자 사는 경우가 많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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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은 오월인데 너는 미적분을 풀고 있다는 시구처럼, 창밖엔 겨울비가 내리는데 나는 겨울잠을 잤다. 까맣고 촉촉한 겨울밤 공기에 휩싸여 화양연화ost 라도 들었어야하는데,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겨울비도 아닌데 아깝다. 으슬으슬 춥고 몸이 땅으로 꺼져 최대한 웅크리고 있다가 잠이 들었다. 그간 애들 방학하고부터는 매일 아침 10시에 일어났는데 오늘은 눈뜨니 8시. 어제 빨리 자 일찍 일어난 줄 알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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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화장대 세간은 단출하다. 스킨과 로션, 영양크림, 비비크림 정도. 가끔 아이크림이나 향수도 끼어있다. 입국자들에게 선물 받은 건데, 끝까지 써본 적이 없다. 성의가 고마워 간직하다가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고서야, 그것들은 쓰레기통에서 서글픈 최후를 맞이했다. 그래도 아이크림은 사용률 50%를 상회한다. 향수는 거의 0%다. 그런 내게, 재작년에 업무관계자가 향수를 선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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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조직을 이탈해 첫 만남을 가진 날, 대화의 주제가 '첫사랑'이었다. 신천역 새마을시장 포장마차. 그는 첫사랑의 여자와 7년 연애 끝에 헤어졌으며 독신으로 살거라고 말했다. 사랑하던 여자가 부모의 의견에 따라 다른 데로 시집을 가버렸으니 혼자 살면서 지순한 사랑을 지키고 싶은 눈치였다. 좀 귀엽기도 하고 참신했다. 여자보다 남자가 더 편하고 커피보다 술이 더 좋았던 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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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떻게 너를 낳았을까. 태어나줘서 고마워~" 딸아이만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고장난 벽시계에서 뻐꾸기 튀어나오듯이 수시로 나오는 말이다. 그러면 딸아이는 즉각적으로 화답한다. "괜찮아. 어차피 엄마가 낳았으니까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114 안내원처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매번 같은 대사가 나온다. 고 작은 입에서. 그걸 지켜보는 아들은 '둘이 잘한다'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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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층 부엌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단지 풍경이 아름답다. 오층짜리 아파트 자주색 지붕이며 놀이터며 주차장 자동차며 동산의 소나무, 그리고 건너편 용왕산까지 하얀 눈 수북하다. 근하신년 연하장에서나 보았던 비현실적인 그림이다. 지붕에 눈을 태운 163번 버스도 토마스기차처럼 느릿느릿 지나간다. 우리 아파트 옥상에도 눈이 덮여있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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