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등급화된 신체와 사우론의 눈

- 고병권(수유너머R)

여러분도 한 번 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1급 장애인, 2급 장애인, … 사실 저희 아버지도 2급 뇌병변 장애인입니다. 등급 판정 받을 때 어떻게든 한 등급이라도 높았으면 하고 노심초사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떤 삶을 살게 되느냐가 이 등급 판정에 달려있으니까요. 이번주 <위클리 수유너머>의 표제에 들어간 ‘생사의 저울’이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일상을 가능케 하는 온갖 서비스들이 국민연금공단이 지정한 전문가의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장애등급 재심사 결과 35% 정도의 장애인들이 등급 하향 조정되고 0.4%정도만이 상향 조정되었다고 합니다. 이 수치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소위 ‘가짜 장애인’이 떠오르십니까. 아마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요. 장애인 복지 시스템이 그냥 퍼주기였다고 생각하세요. 누군가에게는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장애인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는 살피지 않은 채, 뭔가 대단한 부정을 적발한 듯 득의양양해 하는 표정을 보니 보건복지부, 참으로 안습(!)입니다.

장애인이 1급 판정을 받았다고 ‘황제의 식사’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1급을 받지 못하면 정말 ‘생사의 저울’에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니 별짓을 해서라도 올리려는 것이죠. 이번호 박경석 선생님의 글을 보세요. 장애등급제 심사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여러 사례들을 목격하게 될 겁니다. 의사의 개별적 성향이나 단순 실수, 관청의 행정 편의적 조치 하나가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위태롭게 만드는지 그저 무서울 따름입니다.

장애등급 때문에 필사적인 장애인들의 모습에서 정부의 죄악을 읽습니다. 박경석 선생님의 표현을 빌자면 ‘쥐꼬리만한 예산 안에 사람들을 가두고 거기에 등급을 매기는 것’ 말입니다. 참고로 이 나라의 장애인 복지예산은 절대액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액으로도(가령 GDP 대비 비율) 다른 OECD 회원국 평균의 1/1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등급하향으로 아낀 예산으로 더 많은 장애인에게 혜택을 제공할 수 있다는 그 좋은 머리와 선한 마음을 왜 장애인 복지예산을 확충하는 쪽으로는 내보이지를 못할까요.

하지만 이번호에서 독자 여러분과 정말로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문제는 장애 심사 기준의 적절성이나 심사과정의 공정성이 아닙니다. 그런 것도 중요합니다만, 그 전에 신체에 등급을 매겨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그런 발상 자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습니다. 저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만 장애등급제를 운용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라는 군요. 그럼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하는 걸까요. 장애 등급을 적용하기보다 각 장애인들이 기본권을 유지하는 데 필요로 하는 서비스들을 조사 평가해서 제공한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부터는 아버지 복지카드에 적힌 ‘2급’이라는 말이 왜 그리 낯설어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등급화된 신체. 그러고 보니 20여 년 전 대한민국 여느 남자들처럼 옷을 벗고 저울대에 올라간 일이 떠오릅니다. 그때 군의관이 그랬습니다. ‘축하합니다. 1등급입니다.’ 만감이 교차했는데, 어떻든 모니터에 써진 ‘1급 현역’을 크게 복창했습니다. 거기엔 온갖 사연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거기서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단지 신체로만 우리는 의사의 눈앞에 던져졌고 등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평소에 시민들은 여러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한 번쯤은 맨 몸뚱이를 국가 권력에게 검사 받아야 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생사여탈을 쥐고 있는 권력이 지켜보는 그 저울대에 매번 올라가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장애인들입니다. 저울대에 올라가는 순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환경에서 사는지, 무슨 활동을 하는지, 어떤 욕망을 가졌는지, 이런 것들은 모두 사라집니다. 그의 욕망, 그의 활동, 그가 사는 환경이 모두 ‘그’를 구성하는 것들인데, 이것들 모두를 빼버린 채, 어떻게 ‘자연적 신체’ 하나를 고립시켜 저울대에 올려놓고 등급 판정을 내릴 수 있는 걸까요. 이번호 <전선인터뷰> 박김영희 선생님 표현을 빌자면, “소시장에서 귀에 달아주듯 1등급, 2등급…”하고 말이죠.

장애등급 판정은 인간을 그렇게 발가벗은 신체로 바라보는 권력의 ‘눈’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눈’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비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 중증장애인처럼 보여야 살 수 있으니까요.” 그 ‘눈’ 앞에서 장애인, 아니 우리 모두가 느끼는 ‘비굴함’, 거기에 권력의 원천이 있는 게 아닐까요. 한편으로는 더 나은 등급을 받기 위해 구걸해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차별적 존재로, 소위 ‘비정상인’으로 생산해야 합니다. 요컨대 우리는 ‘살기 위해서’ 높은 등급의 장애인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결국 ‘장애인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장애인 등급제를 폐지하자는 것은 바로 이 ‘눈’을 없애자는 겁니다. 그 앞에서 우리를 비굴하게 만드는, 아니 우리의 비굴함으로 자신의 힘을 얻는 저 어둠의 군주 ‘사우론’의 눈이 있는 한 우리는 모두 ‘장애인의 운명’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저 ‘살기 위해서’ 우리의 욕망을 축소해야 하고 활동력을 감소시켜야 하는, 다시 말해 ‘살기 위해 비굴해져야 하는’ 이 이상한 구조를 이제 정면으로 문제 삼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번호 <동시대반시대> 원고들 모두를 꼼꼼히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획일적인 잣대로 장애를 ‘모자람’으로 쉬 판단하는 편견과 무지”를 질타하며, 장애클로버(?)인 ‘행운의 네 잎 클로버’ 이야기를 들려주신 정중규 선생님. 사실 이번호에서 ‘장애인 등급제’를 다룬 데는 선생님의 제안이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아울러 <전선인터뷰>에서는 ‘장애인 등급제’만이 아니라 여성장애인 운동가 박김영희 선생님의 감동과 깨우침을 주는 삶을 엿보실 수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 <위클리 수유너머>에 게재된 원고 중 최장인 박경석 선생님의 글은 지난 달 국회에서 열린 장애등급폐지토론회에서 발표된 원고를 요약한 것입니다. 위클리의 독자들이라면 아무런 무리가 없을 거라 믿으며 과감히 게재했습니다. 저희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독자들께서 보여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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